한의사들에게 한의학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진단법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많은 이들이 맥진(脈診), 즉 진맥이라고 답할 것이다. 신체를 살펴보고(望診), 목소리를 들어보고(聞診), 증상을 물어보는(問診) 것과 함께, 정확한 진맥을 통한 진단은 한의사의 생명과도 같다.
하지만 아직까지 진맥은 대부분 한의사 개인의 주관적인 감각에 의존한다. 때문에 같은 환자를 놓고도 한의사 마다 진맥 결과가 서로 다르게 나오게 마련이다. 반면, 양방 종합병원을 찾았을 때 정확한 진단을 위해 동원되는 의료기기와 데이터는 이러한 주관적인 해석이 개입할 여지를 줄여준다. 바로 한의학이 갖지 못한 부분이다.
때문에 훌륭한 진단법이 있어도 대부분의 경우 후학에 전해지지 못하고 그 사람의 대에서 끝나고 만다.
“없으면 내가 만든다” 맥진기 직접 개발한 소리청 한의원 황재옥 원장
이 부분에서 젊은 한의사들은 종종 좌절을 겪는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했던가. 황재옥(51) 소리청 한의원 원장은 정확하고 표준화된 진맥으로 환자를 제대로 치료하기 위해 직접 맥진기 개발에 나섰다. 그는 "과학화를 이루어내지 못한다면 한의학의 미래 역시 없다"고 단언한다. “침을 놓으려고 해도 맥을 볼 수 있어야 정확한 시술이 가능해요. 그런데 한의원 한 번 돌아보세요. 10군데를 찾아가서 모두 같은 진단이 나오는지 확인해보면 알 수 있어요. 가는 곳마다 한의사의 진단이 다르게 나오는데 어느 환자가 그 의학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한의사를 일컬어 ‘눈뜬 장님’이라며 날카롭게 비판했다. 전국에 1만 4천여개의 한의원이 있지만 한의원이나 한방병원이나 한의학적 진단원리를 현대과학에 응용해 만든 진단기계를 이용하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때문에 진단이 객관화되지도 못했고 환자와 질병치료에 관한 데이터나 통계는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만든 맥진기는 어떤 기계일까? 간단히 말하면 한의사가 직접 손으로 하던 진맥을 기계가 대신해 신체의 파동을 읽고 컴퓨터를 통해 결과를 분석해 보여주는 장비다. 다시 말하면 한의사가 기본적으로 보는 27개의 맥을 모니터 상에서 볼 수 있도록 객관화 시켜놓은 것이다.
사실 이전에도 맥진기는 있었다. 국내 최초의 맥진기는 지금은 고인이 된 백희수씨가 1977년에 개발, ‘희수맥진기’로 불리던 ‘전마 맥진기’다. 당시에는 획기적인 한방 의료기로 평가 받아 일본, 중국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맥진학회의 회원이기도 한 황 원장 역시 이 맥진기를 이용해 환자를 진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후배들이 찾아왔다. 새로 나온 맥진기를 쓰는데 도저히 데이터를 읽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확인해 보니 백희수씨 사후 아들이 아버지의 것을 본떠 만든 기계였다.
하지만 외형만을 빌려온 것에 불과했다. 데이터가 엉망이었다. 당연히 정확한 진단은 불가능했다. 오히려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구형 맥진기가 훨씬 정확했다. 그래서 후배들을 붙들고 구형 맥진기의 사용법과 데이터를 읽는 법에 대해 강의를 시작했다.
하지만 구형 기계에도 약점은 있었다. 의사가 펌프를 이용해 수동으로 압력을 넣어서 측정하는 방식이라 시술자의 숙련도에 따라서 정확성의 편차가 심했던 것이다. 더 정확한 기계가 필요했다. 바로 그가 맥진기를 직접 개발하기로 결심한 이유다.
황 원장은 후배들과 함께 맥진기 개발 연구를 시작했다. 의료기기를 만드는 전문가들을 찾아가 맥진에 대한 소견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 개발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선 기계를 담당하는 공학자들과 한의사인 자신들과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힘들게 했던 것이 정상맥과 다양한 질병을 나타내는 맥파의 객관성 확보였다. 즉 맥진기에 나타나는 맥파의 모습이 실제 환자의 질병과 일치하는가를 검증하는 작업이었다. 그렇게 나타난 맥이 일관성을 유지하는가, 또한 환자의 치료 전과 치료 후의 결과가 실제 환자의 상태와 일치하는 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자금에 대한 압박도 부담이 됐다. 재정 지원을 받지 않았기에 개발비는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기존에 나와있던 진단기 보다 더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기계로 만들기까지의 검증과정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어려운 사정에 7억 원의 사재를 쏟아 부어 마침내 만들어낸 것이 바로 ‘심안 맥진기’다.
심안맥진기는 기존 맥진기와 다른 여러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좌·우측 요골동맥 맥동을 진동센서와 전기적 에너지로 저항 변화를 증폭한 맥진기로,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신호로 변환시켜 본체와 컴퓨터의 전용프로그램을 이용해 맥박의 속도, 맥동간의 간격, 맥동의 파형 등을 기록할 수 있다.
특히 환자의 진맥시 1차 검사 맥상과 2차 검사 맥상이 그래프에 동일한 파형으로 재현되므로 정확한 측정 정보를 알 수 있다.
침맥·부맥의 감지와 맥동 그래프 파형표시가 원터치로 진행되므로 측정시간이 단축되고, 맥동측정 진행과정이 그대로 모니터에 표시된다. 또한 침구 및 처방 투여를 통한 결과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가능하고, 한의학적으로 살펴본 질병의 원인을 객관적인 분석을 할 수 있다.
맥진을 통해서 한의학적 건강검진이 가능하고(건강인·질병인 구분 가능), 오장육부의 병인 분석 및 오장육부 한열허실(寒熱虛實)의 분석은 물론 최초 진단 후 치료기간의 예측 및 치료의 방향을 환자에게 객관적 설명이 가능하다.
현재 이 맥진기를 체험한 한의사들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경북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는 정재학 한의사는 황 원장의 맥진 강의를 듣고 “너무나 신선했다”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그는 “그동안 암이나 종양 같은 위험하거나 힘든 질병을 가진 환자가 오면 무조건 양방 병원에 가 보라고 말하는 내 자신이 답답하고 무능력해 보일 때가 많았다”며 “하지만 강의를 듣고 어느 정도 희망을 얻었다”고 밝혔다.
대전에서 한의원을 하고 있는 박세광 한의사 역시 “맥이 중요한 것은 알지만 솔직히 맥에 대해 잘 몰랐다”며 “맥진기를 이용해 진료하면서 자신감을 얻었다”고 만족을 표시했다.
황 원장은 맥진기의 개발로 인해 한의학은 진단능력의 표준화와 진단의 객관성 확보가 가능해졌다고 자평한다. 서양의학에서나 가능했던 원격진료 역시 가능해졌으며 한의사들이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는 각종 침법이나 처방법 등의 효과에 대해 객관적으로 검증이 가능해 졌다는 것이다.
황 원장은 자신이 개발한 맥진기의 데이터 오차를 줄여나가면서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 시켜나 갈 작정이다. 그렇게 해서 한의학을 하는 모든 나라의 의학자들에게 맥진기를 보급, 한의학의 세계화에도 일조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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