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와 고려 때 널리 애용됐던 차는 조선에 들어서면서는 고약처럼 고아 연고로 만들어 상비 구급약으로 쓰였을 뿐, 일상의 기호음료로서의 지위는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잊혀져가던 차 문화는 18세기로 들어서며 다시 되살아났고 다산 정약용과 그의 제자 초의선사, 그리고 추사 김정희에 의해 더욱 꽃피게 됐다.
고전문학자인 정민 한양대 교수는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김영사 펴냄)에서 이 세 인물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의 차 문화를 살펴보고 있다.
“차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고 말하는 정 교수가 차에 빠져들게 된 것은 2006년, 18세기 말의 다서(茶書)인 ‘동다기’를 직접 발굴하면서부터다.
유물전에 출품됐던 다산의 친필 편지를 보기 위해 전남 강진을 찾았다가 다산의 저작으로만 알려졌을 뿐 실물이 존재하지 않던 ‘동다기’ 필사본을 발견한 것이다.
알려진 것과 달리 이덕리가 쓴 것으로 밝혀진 ‘동다기’와 이보다 30년 앞선 1755년 지어진 이운해의 ‘부풍향차보’를 토대로 정 교수는 우선 조선 차 문화 중흥의 시작을 짚어본다.
이어 다산과 초의, 추사의 차 사랑을 각종 문헌을 토대로 살펴본다.
몸이 허약했던 다산은 만덕산 백련사에 놀러갔다가 주변에 야생 차가 많이 자라는 것을 보고 승려들에게 차 만드는 법을 알려줬고 이후 다산의 제다법은 다른 사찰의 승려들에게 퍼져나가게 됐다.
당시 다산이 마시던 차는 잎차가 아닌 떡차였는데, 다산이 제자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 제다법이 자세히 나와있다.
“올들어 병으로 체증이 더욱 심해져서 잔약한 몸뚱이를 지탱하는 것은 오로지 떡차에 힘입어서일세. (중략) 다만 지난번 부친 떡차는 가루가 거칠어 좋지가 않더군. 모름지기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아주 곱게 빻아야 할 걸세. 또 반드시 돌샘물로 고루 반죽해서 진흙처럼 짓이겨 작은 떡으로 만든 뒤라야 찰져서 먹을 수가 있다네.”(120쪽)
스물네 살 때 당시 마흔여덟이던 다산을 찾아가 차를 배운 초의는 장시 ‘동다송’을 통해 차의 역사와 우리 차의 효용, 그리고 차를 마시는 절차와 방법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전다박사(煎茶博士)’로 불린 초의의 존재를 더욱 빛낸 것은 바로 추사 김정희. 초의차를 접하고 단번에 매료된 추사는 초의에게 수차례 편지를 보내 ‘반 협박’에 가까울 정도로 차를 얻는 데 몰두했다.
“편지만 있고 차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구려. (중략) 기꺼이 사람을 양단간에 딱 끊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이것이 과연 선(禪)에 맞는 일이오? 나는 대사는 보고 싶지도 않고, 대사의 편지 또한 보고 싶지 않소. 다만 차에 얽힌 인연만은 차마 끊어 없애지 못하고, 능히 깨뜨릴 수가 없구려.”(390쪽)
이 책에서 정 교수는 그동안 차 문화와 관련된 저술에서 반복돼온 오류도 바로잡고 있다.
가령 다산의 말로 자주 인용되는 “차 마시는 민족은 흥하고, 술 마시는 민족은 망한다(飮茶興 飮酒亡)”는 말은 다산의 저술 어디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이야기다.
또 대표적인 차 고전인 ‘동다송’의 경우 각 구절 밑에 각주를 단 것을 단락표시로 착각해 17송 또는 31송 하는 식의 분절법이 생겼는데 저자는 “이는 설명의 편의를 위해서도 적절치 않고 초의 자신의 원래 의도와도 전혀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정 교수는 후기를 통해 “우리도 중국처럼 우리 차 문화를 종합하는 전망을 수립할 때가 되었다”며 “자료를 집성해서 묵직한 자료집으로 간행하고, 차 문화사의 전체적 전망을 세우는 작업을 좀 더 정치하게 진행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강조했다.
752쪽. 3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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